전체게시글 48건
서남암문(西南暗門)과 서남포사(西南鋪舍)
서남암문은 화성 서남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화성의 5곳 암문 가운데 유일하게 문 위에 군사들이 머무는 포사舖舍를 세웠다. 이곳은 지형상 적에게 빼앗기면 성안이 노출될 우려가 있어서 특별히 포사를 만들어 침입을 대비했다. 암문에는 화공에 대비하여 오성지도 설치하였다. 이름은 암문이지만 성 안팎을 드나드는 통로가 아니라 용도를 거쳐 서남각루(화양루)로 나가는 문이다.
VIEW MORE북수문, 화홍문(北水門, 華虹門)
북수문은 화성의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 일곱 칸의 홍예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는데, ‘화홍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br /> 누각은 본래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 시설이지만 평소에는 주변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쓰였다. 수문을 통해 흘러온 물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장쾌하게 떨어지는 모습인 ‘화홍관창華虹觀漲’은 화성에서 꼭 보아야 할 아름다운 경치로 손꼽힌다.<br /> 화홍문은 조선 헌종 14년(1848)에 수문과 누각을 다시 지으면서 형태가 약간 달라졌다. 1932년에는 ‘수원명소보존회’를 주축으로 수원시민이 힘을 모아 홍수로 무너진 누각을 다시 지었다. 2016년에는 화성성역의궤를 근거로 창문을 복원했다.
VIEW MORE남수문(南水門)
남수문은 화성의 남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 수원천 상류에 있는 북수문에 일곱 칸의 홍예를 만든 반면 하류에 있는 남수문에는 아홉 칸의 홍예를 두었다. 홍예란 무지개같이 반원형 꼴로 쌓은 구조물로 주로 다리나 천장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남수문의 바깥쪽은 홍예 위로 벽을 높이 쌓아 적이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 안쪽에는 군사 수백 명이 수문을 지킬 수 있는 장포長舖를 만들었다. 아홉 개의 수문에는 철책을 설치하여 적의 침입을 대비했다.<br /> 1922년 큰 홍수로 유실되어 2012년에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복원했다. 복원한 남수문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하부에 수로를 별도로 설치했다.
VIEW MORE동장대, 연무대(東將臺, 鍊武臺)
동장대는 장수가 군사 훈련을 지휘하던 곳으로 ‘연무대鍊武臺’라고도 불린다.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서장대는 군사 훈련 지휘소로 썼다.<br /> 동장대는 대지 전체를 3단으로 나누고 마당 한가운데에 장수가 말을 타고 오를 수 있도록 경사로를 만들었다. 본래 전면은 개방하고 나머지 삼면은 벽이나 창문을 단 형태였으며, 가장 안쪽에 온돌방 한 칸이 있었다. 건물 뒤쪽으로는 수키와로 담장을 꾸민 영롱장玲瓏墻이 있다.<br /> 정조는 동장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내려주는 호궤犒饋 행사를 베풀었다. 화성 축성이 마무리되던 시기인 1796년 8월 19일, 감독관과 일꾼 등 2,700여 명이 호궤에 참여했다.
VIEW MORE서장대(西將臺)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자리 잡은 군사 지휘소이다.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서장대는 군사 훈련 지휘소로 썼다. 서장대는 시야가 트여 있어 멀리 용인 석성산 봉화와 융릉 입구까지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고 한다.<br /> 서장대는 아래층은 사면 3칸, 위층은 1칸으로 위로 가면서 좁아진 형태다. 아래층은 장수가 머물면서 군사 훈련을 지휘하고, 위층은 군사가 주변을 감시하는 용도로 썼다. 정조는 서장대에서 군사 훈련인 성조城操를 거행했는데 1795년의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br /> 위층 처마 밑에 걸린 ‘화성장대華城將臺’와 ‘시문 현판’은 모두 정조의 작품이다. 1795년 성조식이 끝난 뒤 정조는 ‘화성장대’ 현판의 글씨를 쓰고 만족스럽고 기쁜 마음을 시로 표현했다. 화성에서 유일하게 정조가 짓고 글씨를 쓴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VIEW MORE동북노대(東北弩臺)
동북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弩를 쏘기 위해 지은 시설이다. 노대는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다.<br />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다. 동북노대는 별도의 높다란 대를 만들지 않고 성벽에서 돌출시켜 만들었지만 주변이 평탄해서 시야가 확보되었다. 노대와 좌우 성벽이 만나는 지점을 살짝 좁혀 쌓았는데 화성성역의궤에서는 그 모양을 '벌의 허리'와 같다고 표현했다.
VIEW MORE서노대(西弩臺)
서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弩를 쏘기 위해 높게 지은 시설로 군사지휘소인 서장대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노대는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다.<br />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다. 서노대는 화성의 서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팔달산 꼭대기에 있어 적을 감시하기에 적합하다. 팔각형의 몸체가 위로 가면서 줄어드는 안정적인 형태로, 안에는 흙을 채우고 겉은 벽돌로 마감하였다.
VIEW MORE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서북공심돈은 화성 서북쪽에 세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보통 돈대墩臺는 성곽과 떨어진 높은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서북공심돈은 서북쪽 성벽이 꺾이는 위치에 설치했다. 치성 위에 벽돌로 3층의 망루를 세우고 꼭대기에는 단층의 누각을 올려 군사들이 감시할 수 있도록 하고, 외벽에는 화포를 쏠 수 있는 구멍을 뚫어 공격 기능까지 갖추었다.<br /> 조선 정조 21년(1797) 정월, 완성된 화성을 둘러보던 정조는 서북공심돈 앞에 멈춰 “우리나라 성곽에서 처음 지은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 화성에는 모두 세 곳에 공심돈을 세웠는데 서북공심돈만이 축성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VIEW MORE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동북공심돈은 화성 동북쪽에 세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보통 돈대墩臺는 성곽과 떨어진 높은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동북공심돈은 성벽 안쪽에 설치했다. 외벽에는 밖을 감시하고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구멍을 곳곳에 뚫었다. 동북공심돈은 3층으로 이루어진 원통형의 벽돌 건물로서 출입문에서 통로를 따라 빙글빙글 올라가면 꼭대기 망루에 이르는 구조다. 이 모습을 빗대서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정조 21년(1797) 정월, 좌의정 채제공은 동북공심돈을 올라가 본 뒤 “층계가 구불구불하게 나 있어 기이하고도 교묘하다.”며 감탄했다.<br />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절반 이상 무너졌었는데 1976년에 복원해 모습을 되찾았다.
VIEW MORE봉돈(烽墩)
봉돈은 봉화 연기를 올려 신호를 보내는 시설이다. 보통 봉화대는 높고 인적이 드문 곳에 두었으나 화성에서는 시야가 트인 동쪽에 설치해 화성행궁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br /> 봉돈은 외벽과 내부, 계단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벽돌로 만든 화성의 대표적인 벽돌 건축물이다. 높게 쌓은 대臺 위에 횃불 구멍인 화두火竇 다섯 개가 있다. 평소에는 남쪽 끝에 있는 화두 한 곳에만 연기를 올리고, 상황에 따라 연기의 숫자를 증가시켜 전쟁 시에는 다섯 곳 모두 연기를 피웠다.
VIEW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