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수원화성 축성 시 물자조달
조선왕조 창업 초 수도를 한양으로 정한 뒤 궁궐과 각종 관아, 성곽을 조성 한 공사 이후, 화성 신도시 건설과 화성 축성은 조선시대 최대의 국가적 대 역사(大役事)였다. 따라서 화성을 축성할 때 각종 물자가 엄청나게 많이 쓰여졌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겠다.
우선 성을 쌓을 때 돌과 벽돌, 목재, 각종 철물은 물론 일꾼들을 먹일 식량과 땔감, 자재를 나를 수레와 우마(牛馬), 공사를 기록할 지필묵으로부터 단청, 가마니, 땔감, 숯, 노끈, 공구, 석회, 기름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다양한 물자들이 필요했다.
다행히 화성 축성의 종합 공사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는 위와 같은 물자들 외에 밥숟가락, 항아리, 사발, 됫박, 저울, 주걱, 싸리 비, 솥, 가마니 등 자질구레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자의 세세한 항목과 수량, 단가, 구입처 등이 모두 상세하게 기록돼 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화성축성 공사에 들어간 총 공사비용은 물자와 인건비 등을 합쳐 모두 87만3천517냥7전9푼이 소요됐다. 화성성역의궤 제5~6권은 재용(財用)편으로서 여기에는 화성 성역에 사용된 각종 물품의 종류와 수량, 성곽과 각 부대시설별로 소요된 물품의 내용과 단가가 기록돼 있다. 참고로 이때 성인 잡부 하루치 품삯은 대략 2전5푼이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화성 축성 예정지에 있던 집들을 사들이면서 후한 값을 지불했는데 북리 지역에 살던 송복동이라는 사람의 5칸짜리 초가집을 수용하면서 15냥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다.(추가 지급액 10냥:추가 지급액은 보상비일 듯) 그렇다면 당시 5칸짜리 초가집을 매입하려면 집의 상태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대략 2개월 정도 잡역을 하면 됐다는 계산이 나오므로 당시 화폐가치를 알 수 있다. 또 쌀 1섬(당시 1섬은 15말)은 5냥 정도였으며, 소는 1마리에 20.35냥, 무명 1필이 2냥, 숯 1석이 6전3푼, 쇠고기 1근이 5전, 돼지 1마리가 5.34냥이었다. 이는 화성을 쌓는데 투입된 경비는 물론 18세기말의 물품 상황과 물가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그럼 먼저 화성의 축조에 가장 많이 쓰인 석재는 어떻게 확보되었으며 어떻게 운반되었는지 알아보자. 지난 11월 24일 진단학회와 경기문화재단이 공동으로 개최한 화성성역의궤의 종합적 검토 심포지엄에서 경기대 조병로 교수는 화성 축성에 사용된 석재가 모두 20만1천403덩어리로서 이를 가격으로 환산하면 13만6천960냥9전이었다고 밝혔다. 이 돌들은 무게 때문에 멀리서 운반하지 못하고 인근의 △숙지산 △여기 산 △팔달산 △권동(서둔동 권동 방죽{*한국지명총람에는 서호의 옛 제방 이라고 기록. 그러나 화성지에는 권동제언은 화성부 남쪽 5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한국지명총람의 기록이 맞는다면 권동은 돌산이 있던 화서동 동말 일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이 있던 곳, 현재는 건등이라고 불림)에서 채취해 사용했다. 숙지산(熟知山:옛지명은 孰知山)이 있는 곳의 옛 지명은 공석면(空石面)인데 이곳에 돌이 많다는 채제공의 보고를 받은 정조대왕은 1796년 1월 24일 수원에서 환궁하는 길에 "오늘 갑자기 단단한 돌이 셀 수 없이 발견되어 성 쌓는 용도로 사용됨으로써 돌이 비워지게(空石)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孰知)? 암묵(暗默) 중에 미리 정함이 있으니 기이하지 아니한가?"라고 감탄하게 된다. 공석면 숙지산은 지금의 영복여고 뒷산이니 화서동 숙지산을 일컫는 것이다. 지금도 숙지산과 팔달산 곳곳에는 돌을 뜬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산들의 돌을 뜨는 자리를 부석소(浮石所)라고 했는데, 각 부석소에서 캐낸 양은 숙지산 8만1천100덩어리, 여기산 6만2천400덩어리, 권동 3만2천덩어리, 팔달산 1만3천900덩어리 등 18만9천400덩어리였다. 화성 축성에 사용된 돌들을 거의 모두 이 네 군데에서 떠냈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부석소에서 떠낸 돌은 치석소로 보내어 일정한 규격으로 다듬었는데 특히 성곽에 사용된 돌의 경우 일정한 규격에 의해 척수에 따라 대ㆍ중ㆍ소로 규격 화하였다. 이렇게 다듬은 돌은 축성현장으로 옮겨졌다. 돌을 옮기기 위해 우선 정조 대왕의 지시대로 '화살 같이 쭉 곧고 숫돌처럼 평평한' 도로를 개설했다.
돌은 소가 모는 대거(大車:소 40마리가 끄는 수레), 평거(平車:소 4~8마리 가 끄는 수레), 발거(發車:소 1마리가 끄는 수레)와 사람이 끄는 동거(童車:장정 4인이 끄는 수레) 등 수레를 이용해 날랐으며 썰매(雪馬)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때 유형거(遊衡車)라는 수레를 시범 제작해 사용한 바 있는데 이는 대거와 썰매의 단점을 보완한 것이다. 수레를 끄는 소들은 몸집이 크고 다리 힘이 좋으며 체력이 건장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 패장(牌將)을 파견해 각 읍의 장교와 함께 사들이게 했다. 화성 성역에 필요한 수레소는 경기지방에서 309마리, 호서지방에서 50마리, 관동지방에서 80마리, 해서지방에서 167마리로 모두 608마리였으며 그밖에 소 80마리, 말 252마리가 소요됐다. 목재는 장안ㆍ팔달ㆍ화서ㆍ창룡문 등 사대문과 동ㆍ서장대, 각종 포루와 각루, 포사 등을 건축하는데 이용됐다. 목재는 종류에 따라 모두 2만6천206주가 소요됐다. 돈으로 환산하면 약 4천902냥5전5푼이었는데 석재가 13만6천960냥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기둥과 서까래에 사용할 목재의 확보는 화성 축성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목재는 충청도의 안면도, 황해도의 장산곶, 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한강 인근 지방, 전라도 좌수영의 순천ㆍ광양ㆍ흥양ㆍ구례ㆍ방답진ㆍ사도 진, 전라우수영의 자주ㆍ진도ㆍ장흥ㆍ강진ㆍ무안ㆍ흥덕ㆍ김제ㆍ완도, 경기도의 광주와 남양, 광평 등에서 베어 들였다. 이때 나무를 벤 산은 국가의 큰 공사에 사용할 나무를 보호하던 금양처(禁養處), 또는 봉산(封山)이라고 했다. 임금님의 허락없이 봉산이나 금양처의 나무를 벤 자는 국법으로 엄하게 다스렸다. 이들 목재의 운송은 배나 뗏목을 이용해 이루어졌는데, 충청도나 황해도, 호남의 목재는 각 수영에 딸린 병선(兵船)이나 개인의 어선을 이용했고, 경기도나 강원도의 한강 주변에서 베어낸 목재는 뗏목을 엮어 운반하다가 바다에서 배로 옮겨 실어 운반했다고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돼 있다. 바닷길을 이용해 운반된 목재는 구포(현재 화성시 시화호 연해에 있는 구 포리)에 치목소(治木所)를 설치해 다듬은 다음 수원의 화성 공사 현장으로 옮겨졌다. 구포의 치목소에는 감독과 목수를 파견해 나무를 용도에 맞게 다듬은 다음 수레를 이용해 수원까지 날랐는데 이를 위해 도로를 고치는 등 목재 운송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나무를 베거나 운반하고 다듬던 사람들에게도 노임이 지급됐는데, 특히 나무를 베는 사람이나 이를 운반하는 사람에게는 나무 한 그루당 1전, 또는 5전씩이 주어졌다. 화성을 축성할 때는 석재와 목재말고도 많은 양의 철재(鐵材)가 필요했다. 이 공사에 소요된 철재는 모두 55만9천31근9냥3전과 철엽(鐵葉:대문에 붙이는 쇠장식으로서 물고기 비늘모양으로 만들었다)2천860조각, 기타 연장류 등이 소용되었는데 이를 금액으로 계산하면 모두 8만6천215냥7전1푼이었다. 이 철물들도 목재와 마찬가지로 각 도별로 나누어 구입토록 했으며 일부는 일반 상인들로부터 구입, 배를 통해 운송했다.
한편 벽돌 및 기와도 많이 소용됐다. 벽돌은 전국에서 벽돌장들을 수원으로 소집해 임금을 지불하면서 구웠으며 의왕시 백운산 아래 왕륜(旺倫)의 가마〔와벽소:瓦쮱所〕에서 굽다가, 후에 화성 북쪽 성(北城)밖, 화성시 정남면 서봉산의 서봉동(棲鳳洞) 등에 가마를 새로 설치, 모두 3곳에서 제작했다. 축성에 사용된 벽돌을 제작하는데는 2만6천577냥1전5푼의 비용이 들었다. 기와 역시 왕륜과 서봉, 사관평(肆觀坪:사근평)의 가마〔번와소:燔瓦所〕에서 제작했으며 제작비용은 6천198냥3전6푼이었다. 벽돌과 가마 굽는데 사용한 땔나무는 인근 개인 소유 산에서 돈을 주고 구입했다. 기타 물자로는 숯과 석회, 단청, 지필묵, 기타 잡물 등이 있었다. 숯은 모두 6만9천56가마로 지평, 광주, 용인에서 사들였다. 석회는 경기도 파주와 풍덕, 수원의 어랑천, 충청도의 평신진에서 구웠으며, 황해도 금천에서도 많은 양의 석회가 배를 통해 수원으로 수송됐다. 종이는 대부분 서울의 종이전에서 사들였으나 정조 19년(1795) 광교동 입구(연무동)에 지소(紙所)를 설치하고 종이제조 기술이 있는 승려를 모아 제작했다. 연무동 수원여객 버스 종점 부근을 지금도 지소, 지쇄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밖의 잡물(雜物)은 지난 호에서 밝힌 것처럼 그 종류와 수량이 너무 다양하고 많아 여기에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그 중 몇 가지를 보면 소가죽 1천870장, 가마니 5만9천600닢, 새끼 39만1 천986발, 동아줄용 삶은 마 6천75근, 돌 운반용 생칡 2천852동이49근, 땔나무 10만8천432단, 볏짚 24만2천284단, 숫돌 74덩이, 크고 작은 솥 86개, 큰 독 71개 등 140여 종류로 잡물 총 구입비는 12만3천744냥 1전 4푼이었다.
물론 이 세세한 기록들은 모두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돼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새삼 우리 조상들의 철저한 기록 정신에 고개가 숙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