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참다운 효를 위한 또 하나의 수도首都 '수원화성'
수원은 효원의 도시로 불립니다. 조선시대 위민군주 정조의 효심이 깊이 담겨 있는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원화성을 정조의 효심이 담긴 결정체로 보기도 합니다. 정조 효의 결정체라고 하는 것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당시 수원도호부(현재 화성시 태안면 안녕리) 관아가 있는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수원 팔달산 일대로 천도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조의 효는 약간 문제가 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개인적인 효도로 인해 국가의 엄청난 예산을 들여 수도를 옮기려고 한 것은 현재적 관점만이 아니라 200여 년 전의 관점으로 보아도 절대 옳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수원을 효원의 도시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정조가 진짜 수원으로 천도를 하려고 한 것일까요? 이 두 가지가 과연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인지 이 문제의 진실을 들여다 봅시다. 이 내용은 2018년 인인화락 가을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정조의 진짜 효
정조는 21세기 현재적 관점에서 생각해도 정말 대단한 효자다. 조선 500여 년의 역사만이 아니라 우리 역사 전체에서도 정조는 진짜 효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조가 효자인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효자의 개념인
허벅지 살을 베어 부모를 위해 국을 끓여 주거나 아니면 추운 겨울날 몇 개의 산을 넘어 무릉도원을 찾아가서 복숭아를 따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다. 정조의 효는 바로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에 기반을 둔다.
억울하게 뒤주에서 돌아가신 사도세자의 불명예를 회복하고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복권해 주는 것이 사도세자를 위한 효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조는 몇 가지 특별한 행사를 추진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아버지처럼 군복을
입고 행차를 다니는 것이었다. 사도세자는 15세에 영조를 대신해서 대리청정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다녔다. 그래서 정조는 국왕이 되고 나서 사도세자처럼 외부로 행차를 할 때 곤룡포와 익선관을
쓰지 않고 군복을 입고 전립을 썼다. 그리고 1791년(정 조 15)에 사도세자가 했던 것처럼 군복을 입고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물론 이 초상화는 사도세자를 수원으로 이전한 묘소인 현륭원 재실에 걸어놓고 살아계실
때 행하지 못한 효도를 행하겠다고 했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진정한 무인군주(武人君主)임을 강조하기 위해 아버지가 만든 18가지의 무예에 마상기예 6기를 추가해 24가지 무예로 만들었다. 이 무예서가 바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이다. 『무예도보통지』
서문에 자신은 아버지가 한 일을 따랐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이야기 한다. 조선의 무예를 새롭게 정리하여 중국과 대등한 군사체제를 갖추고자 한 모든 것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유업이고 자신은 그 유훈을 계승한 것이라는 것을
백성들과 신료들에게 이야기해서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처럼 항상 무예를 수련하고 활쏘기를 했다. 조선 역사상 태조 이성계와 더불어 최고의 명궁(名弓)으로 평가받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정조가 대궐 밖으로 행차를 할 때 반드시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다녔다. 그 이유도 사도세자가 온양으로 행차할 때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갔기 때문이다. 가마를 타거나 곤룡포를 입을 수 있었음에도 사도세자는 군복을
입고 직접 말을 몰았는데, 이러한 행동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정조는 아버지를 따라 늘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다녔다. 이것이 바로 정조 효의 핵심이다. 정조가 이러한 효를 실천하기 위한 터전으로 선정한 곳이
바로 수원이었다.
정조는 왜 수원신읍치를 만들었는가?
정조는 1789년(정조 13)에 수원도호부 관아 일대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천봉하고, 관아를 비롯한 읍치 전체를 현재의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일대의 팔달산 동쪽 지역으로 이전했다. 도시를 옮긴지 4년이 지난
1793년(정조 17) 1월 정조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 화성유수부에 장용영외영(壯勇營外營)을 신설했다. 도호부는 정3품 부사가 다스리는 큰 고을이었다. 하지만 유수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유수부는
정2품 이상의 유수가 다스리는 지역으로 한성부와 버금가는 고을이었다.
수원의 지명은 대부분 지역의 특징과 관련 있거나 물과 연계된 이름, 또는 수원화성과 연관된 이름이 많다. 그중 율천동이란 율전동과 천천동을 합한 동네다. 먼저 율전동은 율천동에 속한 법정동으로 옛날 이 동네는
밤나무가 아주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밤밭이라고 불렸고 지금의 이름인 율전동은 바로 이 밤밭을 한자로 쓴 것이다. 천천동은 율천동에 속한 법정동으로 옛날부터 이 동네에는 큰 샘물이 있어서 큰 내를 이루어 서호천으로
흘러들어 갔다. 그래서 샘내 마을 또는 이를 한자로 표현한 천천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즉 천천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샘내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정자동은 정자1동과 정자2동으로 나누어져 있는
동네다. 정자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이 동네에는 영화정 등의 정자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따라서 정자동이라는 이름은 정자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화서동은 화성의 서문을 화서문이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 동네에
있다. 그래서 화서문이 있는 동네라고 해서 화서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화서1동과 화서2동으로 나누어져 있다. 연무동은 법정동으로 연무동, 상광교동, 하광교동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 동네에는 연무대가 있다.
이곳은 옛날 군사 훈련과 무술 연마를 하던 곳으로 동네 이름도 연무동이라 하게 되었다. 우만동은 우만1동과 우만2동으로 구성되어 있는 동네인데, 옛날 이 동네에 최씨와 임씨 등이 소를 많이 키우며 살았기 때문에
우만이 또는 소만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했다. 지동의 동네에는 옛날 연못이 있었기 때문에 연못이라는 뜻을 가진 한자인 ‘지(池)’ 자를 써서 ‘지곡’이라 불렀다. 지금은 지동이라 부르는데, 이는 지곡이라는 옛날
이름을 이어받은 것이다. 따라서 지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연못이 있는 동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매교동 안에는 매교동과 교동 2개 동의 법정동을 두고 있다. 매교동에는 조선 시대 정조 대왕이 행차하실 때 지나던
다리였던 매교가 있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매교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따라서 매교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매교라는 다리가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정조는 수원이라는 도시 이름을 화성(華城)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화성(華城)’이란 이름의 화(華)는 3가지의 의미가 담겨있다. 바로 부유함(富), 건강하게 오래 살기(壽), 인구번성(多男子)의 의미이다. 이 3가지의 뜻이 담긴 화(華)자를 넣어 도시를 만들고, 진정 아버지가
묻혀 있는 새로운 고향인 수원을 화(華)의 도시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화성유수부의 승격은 1년 뒤에 있을 화성축조를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었다. 화성 축성은 왕권을 강화하여 민생안정을 추구하는 정조의 장기적인 정국
운영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정조는 화성유수부를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배후도시로 만들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화성유수부 승격과 더불어 장용외영을 신설한 것이다. 사실 정조가 수원 팔달산
일대를 선택한 것은 실학의 비조라고 불리는 반계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읽었기 때문이다. 반계 유형원은 팔달산 일대가 충청, 전라,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천하 교통의 요지이고, 이곳에
성곽을 쌓는다면 한양을 보호할 수 있는 대도회(大都會)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정조는 이 글을 읽고 오래전부터 수원 팔달산 일대를 유심히 조사했고, 마침내 때가 되어 효종이 돌아가신 이후 천하의 길지로 알려진 수원
화산으로 아버지의 묘소를 옮기고, 그 일대에 있는 관아와 각종 공공기관 그리고 백성들의 집을 팔달산 일대로 이전하게 했다.
정조는 화성유수부에 장용외영을 설치하여 화성유수로 하여금 장용외사를 겸하도록 하는 조처를 단행 했다. 이는 조선 정치사에서 매우 파격적인 일로 지방의 일개 고을이 국왕의 친위도시로 거듭나는 일이기도 했다. 정조는
화성유수부를 신설하면서 수원지역이 자신을 비롯한 왕실의 고향과 같이 중요한 곳이며 따라서 지위를 격상시켜야 하며 수원지역의 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조는 초대 화성유수로 1790년부터 좌의정으로 독상(獨相)체제를
유지한 채제공을 임명했으니 화성유수부와 장용외영의 신설이 갖는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즉 국왕을 제외한 최고의 고위관료를 특지로 화성유수에 임명한 것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정조 자신이 추진하는 왕권을 강화해 새로운
경장정책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 신설되는 화성유수부의 수장이 조정 내에서 가장 비중 있는 인물이 임명되어야만 그에 따른 다양한 정책 지원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화성을 또 하나의 수도로 건설하라
정조는 화성유수부에 장용영외영을 설치하면서 그 이후 장기적인 계획을 준비했다. 바로 수원을 새로운 또 하나의 수도로 만드는 일이었다. 기존 수도인 한성부와 함께 자신이 머물면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수도를 말이다. 이를 위해 대대적인 화성 건설을 추진했다. 정조가 더 일찍 화성건설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794년(정조 18)에 시작한 것은 정조에게 숨은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이전하고 세자를 얻었다. 훗날 순조가 된 세자가 태어난 해는 1790년이다. 정조는 세자가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어 수원에서 머물기를 희망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도세자의
복권 때문이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고 난 후 영조는 사도세자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못하게 막았다. 사도세자에 대한 충성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세자에 대한 칭찬을 해도 그것을 역모라고 규정지을 정도였다. 그리고 세손인
정조에게 훗날 국왕이 되었을 때 절대로 사도세자를 역적의 죄목을 벗기고 국왕으로 추존하지 못하게 하는 특명을 내렸다. 이러한 할아버지 영조의 명령 때문에 정조는 자신이 국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높이 받들지 못했다. 조선시대 국왕이 돌아가신 자신의 생부(生父)를 국왕으로 받드는 일이 실제로 존재했다. 인조가 자신의 부친 ‘정원군’을 원종(元宗)으로 추존하여 종묘에 위패를 봉안하게 했다. 정조 역시
사도세자를 이처럼 추존하고 싶었으나 할아버지 영조의 엄명으로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정조는 묘책을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아들이 15세가 되면 국왕의 지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이 되는
것이다. 새로 국왕이 된 세자가 할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존하게 하는 방식을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머물 수원에 성곽 쌓기를 1794년에 시작한 것이다. 성곽이 3년 만에 완성될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10년 걸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1794년에 시작하면 1804년에 완공이 되고, 그 해가 바로 세자가 15세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조가 계획한 모든 것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화성행궁의 규모를 대대적으로 늘리며 수원을 상왕의 수도로 만들 계획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한양은 주상(主上)의 수도, 수원(화성)은 상왕의 수도로 정조가 계획한 상왕은 주상보다 훨씬 권한이 센
것이었다. 상왕은 조선 모든 관리들의 인사권과, 사법권 그리고 군대통수권을 갖는 것이다. 이는 조선에 전례가 있었다. 바로 태종이 세종에게 국왕의 지위를 물려주었을 때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태종과 세종대의 역사를
정조는 그대로 계승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수도 한양은 이미 노론으로 대표되는 기득권들이 좌지우지하는 지역이었다. 국왕 정조가 아무리 개혁을 추진한다 하라도 이들 기득권이 따라주지 않고 오히려 맞대결을
벌인다면 정조로서는 큰 낭패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수원을 자신의 개혁의 터전으로 삼아 조선 전체를 개혁하는 또 하나의 수도로 만들고자 원대한 꿈을 품고 화성을 축성한 것이다.
인인화락 2018년 가을호 Vol.24
글 | 김준혁(한신대학교 정조교양학과 교수) 사진 | 수원화성박물관, 수원박물관, 수원광교박물관, 수원문화재단